해방 당시 일본 본토에서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백선엽의 후원으로 미 군정에서 한국군 대위로 편입하고 5.16이후 박통 정권의 실세로. 정치 군인 사조직 하나회를 만든 이후락은
중정부장 당시 비호 했던 영남, 서울지역 조폭들과
마약조직의 뒤를 봐준 댓가로 얻은 풍부한 자금으로
당시 생활고에 허덕이던 수 많은 군인 간부들과 장성급 들의 조직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대고
박정히 이후의 시대를 대비하고 있던 와중에 73년도에 터진 윤필용 필화 사건 때문에 대통령직에 대한 야욕이 꺽여버리고 중정부장에서도 해임된 이후락에게
65년 한일 협정 이후 독도 문제로 박정희와의
밀월 관계가 끝나고 대립했던 일본의 우익 세력이 접근하게 되고 이들의 협력으로 74년 8.15 기념식장에서 1차 박정희 암살을 실행하게 되는데
이때 사용된 총기는 일본 오사카 관내에서 분실된 일본 경찰의 총기였으며
범인 문세광의 조선호텔 호텔비를 대납한 것은 삼화건설 의 회사 업무비였으며 후에 삼화 건설 월급 사장인 도 모씨는 인혁당 조작 사건으로 매우 신속하게 사형을 당하게 되는데 사실,
삼화 건설의 회장이자 창업주 정희영은 나경원의 외조부로 이후락의 둘도 없는 죽마고우이자 스폰서인 인물
후에도 그레이스 호텔 안기부 고문실 제공등 악랄한 짓에 협조한다.
문세광과 삼화, 도모씨의 신속한 사형은
당시까지 안기부를 장악한 이후락 계에 의해 조작되고
증거 인멸을 했음을 뜻함.
박 정권 중기 김형욱과 이후락의 파워 싸움에서
결국 김형욱이 미국에서 닭사료로 갈려나간 이후
중정에서 김재규의 안기부로 이어오는 동안
이후락은 강력한 자금과 조폭, 권력 인맥으로 박통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무소불위의 파워를 휘둘렀는데
이때 큰 역활을 한 60년대 일본 야쿠자 마치이 히사유키(町井久之)-한국 이름 정건영- 이후 동성 우애 협력단등을 통해 국내로 들여온 자본으로 설립한 국내 유명 모 건설사의 서빙고동 아파트는
이후락이 친일파와 극우 야쿠자 등과 만든 사설 감옥 위에 지어졌다는 설도 있다.
민주화 운동 인사들과 독립군 계열 군부 파벌 군 인사,
조폭, 사업가, 정치적 정적들을 불법 감금 고문, 살인한 곳으로
이곳에서 감금되었다 풀려난 인물들 중에서 다수는
당시 정부에서 체포, 고문 받은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박정희 정권에서 납치 고문의 피해를 받았다 주장하는 사람들이며
다수의 독립군 출신 민간인, 군 인사들의 행방불명 사건도 이곳을 의심해볼만 하다.
10,26 사태는
이후락의 원대한 계획이 전두환의 배신으로
물거품이 되는 사건이기도 했는데
김재규는 민족의 영웅이 아니라
이후락을 영구 대통령을 만들기 위한 이후락의 돌격조였을뿐이며 최후의 승자는 어부지리의 찬스를 살린 뒷처리 담당 전두환과 그 일당들이였다.
이후 전두환의 부인 이순자는 후환을 두려워해 당시 박통의 아들과 친했던 유명 패션 디자이너와 나이트 웨이터 주씨를 사주하여 박지만씨에게 여자 모델들과 마약을 이용하여 중독시켜 언론을 이용하여 박통의 후대를 끊으려 했다.
당시 그 패션 디자이너는 이순자에게 남대문 페인트 타운 상가를 보상으로 받았다.
이후락은 후일
경기도 이천의 모처에서 임종할 당시
" 제일 나쁜 놈은 전두환이다! "
라는 유언을 외치고 임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