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이후.
일본의 한반도 정책은 친북 이였으며
조총련 에게 매우 큰 특혜를 주었고
80년대 중반까지 일본 사회에서 조총련은
일본 정부의 엄청난 특혜로 국비를 지원하여 학교, 병원, 기업 등에 지원했으며 반면 민단은 초라한 상황으로 일본 정부의 철저한 외면을 받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반전된 계기는
북한의 핵 개발 과 관련이 있다.
70년대 소련의 지원으로 기본적인 원자력 발전에 대해
연구를 지속하던 북한은 소련이 핵무기 전용 기술의 공여를 거부하자
일본의 지원으로 우라늄 추출 기술을 얻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는 일본의 국립 핵 연구소인 가속연구소에서
북한의 가장 유명한 핵 과학자와 조총련계 연구자들을 육성하여 북한에 투입하여 준 사실이 뒤늦게 미국의 첩보에 걸리면서 드러난 사실인데
당시 북한에서 탈출한 옥성소씨가 미 의회에서 진술한 사실로 드러나게 된다.
이후 파키스탄 칸박사를 초빙하여 무기화에 성공하게 된다.
일본은 핵 과학자를 육성하여 북한으로 보내준 것 외에도
반입이 금지된 핵무기 자재와 재료들도 보내주었는데
물론 개별 기업들의 탈법 행위라고 변명하며
만경봉호 입출항을 금지 시키고 조총련을 탄압하는 쇼를 보여주게 된다.
이러한 증거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드러나게 되는데
지금은 대폭 수정되고 재판된 후지모토 겐지의 장군의 요리사 초판본과 출판 직후 인터뷰에 나오는 바에 따르면,
애초에 그는 김정일의 요리사가 아니라 일본에서 건너간 조총련 핵 물리학자의 까다로운 입맛을 위해 초빙된 자로 김정일의 눈에 들어 주석궁에서 요리를 하며 보고 들은 내용을 책으로 편찬했다.
지금은 사라진 그의 초판본 에서는 김정일이 술에 취하면 일본 관동군 복장에 가죽 장화 까지 착용하고 일제시대 당시의 만주군가를 애창하여 깜짝 놀랐다는 내용도 실려있으며 김정일의 유창한 일본어 구사에 놀랐다고 한다.
미국의 감시가 심해진 이후
일본은 공식적으로는 북한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으나
80년대 초반. 까지도 평양의 가장 부촌 지역에는 일본인 전용 고급 주택단지가 있어 일반인들과 격리되어 있었으며
김정은의 모친 역시 일본인 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조총련으로 소개하고 있다.
김정남이 일본으로 여행을 갔을 무렵
일본 극우 계 야쿠자들이 경호를 담당했는데
도쿄 디즈니랜드 등을 관광하고 술에 취해 일본 귀족들이 거주하는 고급 주택들이 즐비한 곳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목격된적이 있는데 이후 김정남은 후계자군에서 제외되며
해외로 떠돌게 된다.
아마도 일본의 막후 실력자의 눈에 잘못 보여 낙마한것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