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 2일 100분 토론-
"한국 처녀, 한국 여성들을 관리한 것은
한국 업소 주인들입니다 .
...
지금 말이죠 버젓이 여자를 쇼윈도에 가둬놓고
성매매 하는 나라가 세계에 많이 있지 않습니까"
"정신대 문제를 성매매 문제로 연결시켜서
말씀하시는 것은 좀 무리가 있는 거 아닙니까?"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미군기지촌 매매춘에
빗댄 발언을 한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찾아가 사과했다
"우리 사회의 도덕 능력을 고양시키는 방향으로
역사를 청산하고 성찰적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그런 뜻으로.... "
위안부 할머니들은 끝내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눔의 집에서 자원봉사하는 일본인도
이영훈 교수의 막말에 화가났다
"할머니들의 개인 역사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경솔하게 말한 것이다."
.
기자 : 2004년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과한 것은
진심이었나요?
개새끼 : 15년 만에 사람이 얼마나 바뀔 수 있어.
내 연구가 얼마나 진전될 수 있어.어?
당신은 15년 전 사람하고 똑같은 사람이야?
지금도 위안부 역사를 계속 왜곡하고 다니는 개새끼
나는 조선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내곡리 사람입니다. 일본인은 우리 고향에서
젊은 부녀자들을 모았어요. 밥을 해주거나
빨래 혹은 부상자를 간호하는 일을 하면 받은
월급을 집으로 보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일본 여자가 우리를 보며 이번 신체검사는
대동아시아 성전과 황군(천황의 군사)을 위해
봉사하는 거라며 희생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옷을 벗으라고 했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은 것을 보고 일본 여자는 몸시
화를 내며 맨 앞줄의 여자아이를 앞으로
불러서는 강제로 옷을 벗기 했습니다.
17,18살 밖에 안 돼 보였습니다
여자아이는 여전히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일본인이 가까이에 있는 우람하고 건장한
남자에게 손을 흔들자, 두명은 여자아이를 앞에
놓고 교대로 강간했습니다. 여자아이는
고통스럽게 발버둥 치고 소리를 질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1941년 3월 16일
죽을 때 까지 잊을 수 없는 치욕스러운 날입니다
그날부터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었습니다
매일 접대하는 일본군은 적을 때는 서너 명
많을 때는 10명 넘게...
일본 군인은 애초부터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성욕을 풀어내는 도구 취급했습니다.
일본인의 삼엄한 감시에 도망갈 기회조차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 박래순 할머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