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흥민씨 원경은 인물이 아름답고 학식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니 이방원이 반해서 민씨 집안 처가살이하며
자녀를 12명이나 낳았다고 한다.
여흥 민씨는 고려시대 왕실과 혼인할수있도록
법으로 정한 15개 귀족이었다.
아무리 이성계가 떠오르는 태양이어도
이방원과 원경의 혼인은 아주 오래전
촌띠기 이재명과 이건희 딸, 이재용 누나
이부진과 혼인하는 쇼킹였을거다.
예의판서, 도평의사사이며 성균관 총 책임자였던
민제는 16살에 성균관에 온 이방원을 눈여겨 보았다.
그리고 혼사를 이성계에게 넣으니 이성계는 감지덕지였다.
16살 이방원과 18살 원경이 그리 부부가 된다.
17살에 이방원은 문과 과거에 급제하며 장인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무식한 무장 집안 이성계에게는 천군만마였을거다.
이방원의 큰스승은 원래 장인 민제였고
정도전과 정몽주가 작은 스승이다.
양녕, 효령 그리고 세종이 되는 충녕까지
민씨 집에서 낳고 자라니 민씨 집안의 뒷배는
태종 이방원이 두려워했음을 이해가 간다.
민무구 등 처남 4명을 모로리 죽여 없애고
세종에게 양위하면서 세종 처가 심씨 집안도
모조리 없애 버린다.
세종 장인 심온은 영의정으로 사위 세종의
왕권을 명나라에서 인정받고 돌아오는 길에
체포되고 고문받고 사사된다.
세종 장모 등 여자는 모두 관노비가 되었다.
그럼에도 소헌왕후 심씨는 폐하지 않았고
세종 이도와 소현왕후 심정이 짐작도 안간다.
소헌이 죽고 세종까지 승하하니
개인적 의문은 이것이다.
왕과 왕비 자리는 비워두는게 아닌데
세종은 왜 새 왕비를 안들였고
문종 역시 단종 생모가 죽은후 왕비를 책봉하지 않았을까?
소헌왕후가 살아있었다면 아들 수양이 야심을
가질리 없었고 문종의 정비가 있었다면
비록 가짜라도 단종은 무사했을거다.
세조가 10년 집권했으나 DNA가 우월한
단종이 30년 집권했다면 조선 역사는 바뀌었을 수도 있다.
업적은 모두 세종이라지만 사실 실무는 세자 문종이 다했다.
고려 말기는 그랬다.
남녀가 평등하고 유산도 동일하게 받았다.
신분이 우선이고 남자가 우선이고
성리학이 시작되는 조선시대와 겹치며
문화적 이념적 충돌에 혼란스러웠던 격변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