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마리아(朴瑪利亞, 1906년 7월 19일[2]~1960년 4월 28일)는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철학자, 교육학자, 교육인, 사회운동가로, 이화여자대학교 부총장을 지냈다. 이기붕의 아내이기도 하였다
1945년 이승만의 귀국 이후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의 시중을 들면서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와 개인적으로 가깝게 지내게 됐다. 그는 이화여대 인맥을 정관계, 재계, 군경의 고위층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박마리아가 이끌던 사설조직 이수회는 이대 인맥과 고위층의 연결을 주선하는 단체로 급성장했다.
1906년 7월 19일(음력 5월 28일)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서 어렵게 자랐다. 박마리아의 어머니 고의대는 감리교 목사 정춘수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면서 개신교에 입문, 전도사가 된 인물이다
조선 YWCA 연합회는 1938년 내선일체의 원칙하에 일본 YWCA 산하로 흡수되는데, 이때 박마리아는 김활란, 유각경과 함께 중심 역할을 했다. 이후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와중에서 지식인들을 동원한 친일 강연에 적극 참가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을 지원했다. 친일 단체 조선임전보국단(1942)에 가담했으며, 각종 간담회에 등장하여 징병제에 호응할 것을 요구했다. 박마리아는 이때의 활동으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 인명 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 인명 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이대 인맥과 군부 내의 영향력
[편집]박마리아는 이화여대 동문회의 회장이었고 이대 출신 친목단체인 이수회의 회장이었다. 그는 군의 장군과 고위 관료들, 그리고 가난한 집에서 성공한 배경없는 개천에서 난 용들과 이대 출신 여성들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그리하여 승진을 바라는 군의 장군들은 박마리아에게 접근하려고 조강지처와 이혼하고 이수회의 젊은 여성과 재혼을 급히 서두르는 일이 나타났다.[3]
4.19 혁명 당시 서울에서 혁명에 참가하지 않던 몇 안되는 예외의 하나가 이화여자대학교였다[5] 한다.
1960년 4월 28일, 결국 경무대 별관에서 당시 육군 소위로 복무 중이던 아들 이강석이 권총을 이용해 이기붕과 박마리아, 동생인 이강욱을 차례로 쏘아 죽이고 자살했다. 책임을 모두 이들에게 덮어씌우고 사태를 가라앉히기 위해 경무대의 곽영주가 살해했다는 설과 제3의 누군가가 타살한 것이라는 소문도 있으나 사실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더 자세한 내용은 위키백과에
둘이 비슷한년 이걸 영화화 해달라고했던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