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버그 미국대사 지명, 좋지 않은 신호 22.02.14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x?CNTN_CD=A0002809929
볼리비아 반정부시위에 ‘미국 개입설’ 일파만파 19.10.19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310096.html
필립 골드버그 주한미국대사 약력
https://kr.usembassy.gov/ko/ambassador-philip-s-goldberg-ko/
한반도 평화 역행하기 쉬운 인사
국무부 홈페이지에 소개된 골드버그 프로필에 따르면, 1956년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시에서 출생하고 보스턴대학을 졸업한 그는 외교관이 되기 전에 뉴욕시와 유엔과 영사기관 등을 연결하는 연락 사무를 수년간 담당했다. 또 특출한 외국어 실력도 갖고 있다. 국무부 홈페이지는 "유창한 스페인어를 구사한다"고 소개한다.
2006년에 그는 스페인어가 공용어인 볼리비아로 파견됐다. 페루와 브라질 사이의 볼리비아로 가라고 미국 상원이 인준을 한 날은 그해 8월 3일이다. 사회주의운동당의 에보 모랄레스가 볼리비아 대통령에 취임한 것은 그해 1월 22일이다. 볼리비아 보수진영이 진보 대통령을 혐오하던 시기에 그가 파견됐던 것이다.
그 뒤 볼리비아에서는 모랄레스 대통령의 개혁 정치를 반대하는 보수파 시위가 격렬해졌고, 그 와중에 골드버그가 페로소나논그라타(persona non grata)로 규정돼 추방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정치 분열과 정부 전복을 모의했다는 것이 기피인물로 규정된 사유였다. 이때가 베이징 올림픽 폐막과 리먼 브라더스 사태(글로벌 금융위기) 발생의 중간인 2008년 9월 10일이다.
그해 9월 12일자 <세계일보>에 실린 "볼리비아 '미(美)가 배후' 미국대사 추방"이란 기사는 "에보 모랄레스의 사회주의식 개혁에 맞서온 야권 지역의 반정부 시위가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지고 있다"며 "그동안 미국이 시위를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해온 모랄레스 대통령은 미국대사를 추방키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모랄레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골드버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골드버그가 <뉴스위크>와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모랄레스의 주장이 과장이 있을 수는 있지만 전혀 근거 없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해 9월 19일자 <뉴스위크> '합중국 외교관, 자신이 볼리비아에서 축출된 이유를 말하다(U.S. Diplomat Tells Why He Was Ousted From Bolivia)'에 따르면, 골드버그는 '미국 외교관들이 미국인들에게 쿠바·베네수엘라인들을 상대로 첩보 활동을 할 것을 지시했다는 설이 있는데 사실이냐?'는 취지의 질문을 받았다.
골드버그는 미국 요원 하나가 오해 살 만한 행동을 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한 뒤 "이것은 지나치게 부풀려진 것이다(this has been blown up way out of proportion)"라며 실수에 불과하다고 발언했다.
골드버그 자신이 이 정도로나마 시인했다는 것은 추방 조치가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끈 고쳐 매는 일이 있기는 있었던 것이다. 미국대사관이 볼리비아 보수진영을 도와 반정부 활동을 부추겼다는 주장이 전혀 근거 없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골드버그는 외교관 신분으로 외국 현지의 국내 정치에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지나치게 부풀려질" 만한 행동을 관리하지 못했다. 그래서 페로소나논그라타로 규정돼 2008년에 추방됐다. 2009년부터는 국무부에서 대북제재 이행을 총괄했다. 이런 인물이 주한미국대사로 부임해 한반도 평화에 어떤 작용을 끼치게 될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대한 정책 가늠하는 잣대
역대 주한미국대사들은 미국의 대한정책을 상징하는 존재들이었다. 1967년 5월 20일자 <동아일보> 기사 '한미관계 측면의 주역 주한미대사 7대'는 "해방 22년의 발자취를 한미관계의 측면에서 볼 때 미국대사의 임기는 공교롭게도 한국 정치의 터닝포인트(전환점)와 일치해 왔다"고 말한다.
미군정이 끝난 뒤인 1949년 4월, 존 무초가 대한민국정부 하의 초대 미국대사로 파견됐다. 역사가 제리 헤스가 정리한 '존 무초, 구술 역사 인터뷰, 1971년 2월 10일(John J. Muccio Oral History Interview, February 10, 1971)'에 따르면, 미국이 무초를 임명한 것은 그의 유럽점령군사령부 정치고문관 경력 등을 감안한 조치였다. 이 경력이 미군정에서 대한민국정부로의 연착륙에 도움이 되리란 판단 하에 자신이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고 무초는 말했다.
한국이 베트남 파병을 결정한 이후이자 한국 대선 보름 뒤인 1967년 5월 17일, 미국은 베트남에서 부(副)대사로 근무하는 윌리엄 포터를 주한미국대사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이 조치의 배경에 대해 5월 18일자 <조선일보> 1면 좌단 기사는 이렇게 해석했다.
"미국은 한국과 월남을 더욱 밀착시켜, 10월이면 민정으로 돌아갈 월남 정부로 하여금 한국이 군정에서 민정으로 넘어간 뒤 (보여준) 정치 및 경제의 운용을 본받게 하고 또 한국의 대월(對越) 정책을 군수 지원, 민간 용역단의 파월 등 주로 월남의 재건 및 군수 지원 등으로 집중하게 하려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뒤이어 이 기사는 "포터 대사의 임명으로 한·미·월 삼각 외교의 틀이 점점 굳어져갈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며 "이것은 또 7월 1일부터 한국의 새 정부가 발족한다는 타이밍과 맞추어 볼 때 결코 우연은 아니라는 해석이다"라고 말한다.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이 격렬했던 1986년에 미국이 중앙정보국(CIA) 지부장 출신인 제임스 릴리를 주한미국대사로 파견한 것도 CIA 지부장의 수완이 대한정책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릴리의 회고록인 <중국통(Chinese Hands)>에 따르면, 그가 선정된 것은 한국 민주주의보다는 한국 안보를 우선시하는 미국의 전략 때문이었다. 한국인들의 민주주의 욕구를 억제하고 전두환 정권을 보호하자면 정치공작에 능한 CIA 출신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작용했던 것이다.
미국은 남북한이 주한미국대사의 파견 배경을 놓고 수십 년간 분석해왔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주한미국대사 임명이 대한정책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어 왔음을 모를 리 없다. 미국대사의 몇몇 특징을 근거로 남북한이 백악관의 의도를 저울질해왔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필립 골드버그를 이 시점에 파견했다. 북한의 대응 수준이 업그레이드되고 있는 시점이다. 한국 대선이 임박한 시점이다. 이런 시점에 골드버그를 지명한 것은 바이든 행정부가 향후 한반도 평화에 긍정적 작용을 할 가능성이 높지 않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국무부 대변인 등을 통해 대북 대화를 꾸준히 제안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런 신호를 보낸다는 것은 바이든 행정부의 진의를 의심케 하고도 남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