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가 한국영토임을 네가지로 말할 수가 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대한민국 건국 후 가진 첫 연두 기자회견(1949년 1월7일)에서 “대일(對日) 배상 청구는 임진왜란 때부터 기산해야 한다.”고 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대마도(對馬島)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350년 전 일본인들이 그 섬에 침입해 왔고, 도민들은 민병을 일으켜 일본인과 싸웠다”며 “그 역사적 증거는 도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마도 여러 곳에 건립했던 비석을 일본인들이 뽑아다가 도쿄박물관에 갖다 둔 것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대마도는 한국 땅’임을 천명할 근거는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두룩하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최단거리가 49.5㎞로 일본의 후쿠오카(134㎞)보다 훨씬 가깝다. 1822년 편찬된 ‘경상도읍지’를 비롯해 ‘삼국접양지도’, ‘조선팔도지도 원본’ 등은 대마도가 부산 동래부의 부속도서로서 지리적·역사적·문헌상으로 우리 땅임을 분명히 했다. 우리는 일본정부에게 350년전에 일본이 강제 침탈한 대마도 반환을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710평방킬로미터 상도와 하도의 대마도는 울릉도와 제주도보다도 더 가까운 거리로 생활전통과 각종 문화재를 통해 한민족의 맥이 그대로 느껴지는 대마도는 일본의 역사서(서기)가 한국 땅이라고 입증하고 있는 대마도를 전 국민은 우리땅으로 반환할 것을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일본 내에 있는 ‘아시아공동행동일본연락회의(AWC·Asian Wide Campaign)’의 사무총장인 사코다 히데후미는 독도 문제에 대하여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이 민족배타주의적 폭거를 노여움에 불타면서 규탄한다. 독도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절대로 ‘일본 고유의 영토’가 아니다. 에도 막부(1600~1867) 때부터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인식하지 않았다. 그런데 1905년 일본이 제국주의적 방법으로 독도를 약탈한 것이다. 우리는 일본 정부의 이러한 태도를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한다.”
또한 “일본 정부는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닙니다. 메이지 정부는 독도가 한국(조선) 땅 임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 (편집자 주: 1876년 일본 도근현은 울릉도와 독도를 자기 현 지도와 지적조사에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해 당시 내무성에 질의하였고, 이에 대해 내무성은 ‘이 문제는 이미 원록 12년(1699년)에 끝난 것으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영토이므로 일본은 관계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일본지도와 지적조사 에서 빼기로 결정했다."
일본인도 알고 있는 명백한 사실을 일본정부는 섬나라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하여 전개했던 전쟁사고방식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가해자로서의 반성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탐욕정신을 불태우고 있다.
이제 우리는 보다 확실한 우리 영토의 넓이를 확실히 해야 한다. 인터넷 자료를 조사한 결과 http://kr.blog.yahoo.com/eun561224/1749���서는 대마도에 대한 명확한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이 자료에 근거하면, 대마도도 우리땅이요, 한국땅이라는 사실이다.
대마도는 남북으로 72km, 동서로 16km인 길쭉한 모습의 두 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인 숙종 45년(1719), 신유한(申維翰)은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기록을 담당하는 관리)으로 일본을 다녀와 '해유록(海遊錄)'을 남겼다.
"대마주(對馬州)의 별명은 방진(芳津)이라고도 한다. 토지는 척박해서 채 백물(百物·100백 가지 産物)도 생산되지 않는다. 산에는 밭이 없고 들에는 도랑이 없고, 터 안에는 채전(菜田·채소밭)이 없다."
세종 24년(1442) 신숙주(1417∼1475)는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 대마도에서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성종 2년(1471)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저술했다. "군(郡)은 8개이고 사람은 모두 바닷가 포구에서 살고 있다. 대마도의 포구는 82개나 된다. 이현종(李鉉淙)이 편찬한 '조선 전기 대일교섭사'(1964년 한국연구원 간행)에 따르면 대마도의 유력자 중에는 조선의 관직을 받은 '수직왜인(受職倭人)'과 특별히 세견선이나 세사미를 배당받는 자들이 있었다. 이키시마(壹岐島)에 있는 수직왜인은 3명인데, 대마도의 수직왜인은 17명이나 된다.
대마도인들은 조선 조정으로부터 받은 교지(敎旨)를 대개 '고신(告身)'이라고 한다. 대마도에서는 오자키의 소다(早田) 집안, 지다류(志多留)의 다게다(武田) 집안, 이나(伊奈)의 쇼야(小野) 집안에서 이러한 고신이 전해 오고 있다. 고신을 받은 대마도인들은 1년에 한 번 조선에 도래하여, 관직에 상당한 예우를 받고 특별한 이득을 얻어갔다. 조선 초기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세약선(歲約船)·수직인선(受職人船)·수국서인선(受國書人船)의 수가 204척이었는데, 그 중에서 대마도 배는 절반에 육박하는 124척이었다.
대마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을 담고 있는 책은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왜인전(倭人傳)이다.
"대마국은 구야(狗耶·가야)에서 강 건너 1000여 리에 떨어진 곳에 있다. 그곳을 다스리는 우두머리인 대관(大官)은 비구(卑狗)라 하고, 부관(副官)은 비노모리(卑奴毋離)라고 한다. 대마도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절해의 고도다. 넓이는 대략 400여 리에 이른다."
"무릇 대마도는 옛날에는 신라국과 같은 곳이었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서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은 모두 신라와 다름이 없다."(13세기 말의 일본 책인 '진대(塵袋)' 제 2권)
"대마도는 섬으로서 본래 우리 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어놀기 시작하였다."(태상왕이었던 태종이 세종 때 대마도 정벌을 하기 전에 군사들에게 내린 교유문)
다음은 대마도 정벌 이후 조선 관리인 강권선에게 일기도 영주 대내전(大內殿)의 관반(館伴)인 노라가도로(老羅加都老)가 한 말이다.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목마지(牧馬地 : 말 기르는 땅)이므로 대내전(大內殿)이 조선과 더불어 협공하여 대마도를 귀국(:조선)에 돌리고자 하다가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의 영주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풍신수길이 조선 침략에 대비하여 무장에게 명령해서 만든 지도인 '팔도 전도'에는, 독도 뿐 아니라 대마도도 조선의 땅으로 나와 있으며, '공격 대상'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도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고려 공민왕 17년(1368) 대마도주가 고려의 만호 벼슬을 가진 사신(使臣)으로 파견된 이래 대마도는 600여 년간 조선과 대국휼소국(大國恤小國) 또는 조공회사(朝貢回賜)의 관계를 맺어온 속방(屬邦)이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고려 문종 36년(1083)부터 공민왕 17년(1368) 사이 대마도에서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친 기록이 있다. 고려 말부터 대마도와 일본 근처에 있는 이키시마(壹岐島)·송포(松浦) 등지에서 발호한 왜구가 한반도 남해안을 약탈하고 때로는 육지 깊숙이 침입하였다. 이에 대해 고려는 대마도주 종(宗)씨와 규슈의 탐제(探題) 이마가와(今川)·오우치(大內) 등 호족에게 사신을 보내, 왜구를 금압(禁壓)하고 고려와는 평화적으로 교역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 말 왜구가 횡행하게 된 근본 원인은 1218년과 1274년 두 차례에 걸친 여원군(麗元軍)의 일본 원정이 있은 후, 일본과 고려·중국의 통교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일본은 남북조(南北朝)의 쟁란(爭亂)에 빠져 있어, 규슈와 대마도 등에는 중앙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했다.
조선민족은 대륙문화의 계승자로서 대체로 도서(島嶼)를 경시하였다. 조선인들은 대마도를 척박한 섬으로만 보았다. 이러한 땅은 반역음모지(叛逆陰謀地)가 될 염려가 있어 거주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와 반대로 일본 본토에서는 범법자와 범죄자가 대마도로 흘러들었다. 이들로 인해 대마도는 해적 소굴이 되었다. 이들이 조선의 해안지대를 수시로 침범해 약탈하자 조선은 강부(降附·항복하여 굴복하다)를 권고하기도 하고, 토벌(討伐)을 수행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재위 1401∼1418년)은 왜구에 대해 강경책을 펼쳤다. 그는 왕위를 세종에게 양위했으나, 군사권은 장악하고 세종 원년(1419) 6월 17일,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 정벌을 단행했다(己亥東征). 이에 따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가 병선 227척과 장병 1만7385명을 인솔해,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의 천해만과 오자키(尾崎)·후나고시(船越)·진나(仁位)를 공격했다.
대마도에 상륙한 이종무 군은 적선 129척을 나포하고 왜구가 사는 집 1939호를 불질러 태워버렸다. 생포한 왜구는 12명이었고 참수(斬首)한 왜구는 114명이었다. 내친 김에 이종무 군은 왜구들이 심어 놓은 곡식도 베어 버려, 요행히 산 속으로 도망친 자들도 굶게 만들었다. 이종무 군이 감행한 기해동정(己亥東征)으로 인해 대마도주와 대마도민들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조선은 대마도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오는 왜인들에게 교역을 허가했으나, 대마도인들의 도래는 허용치 않았다. 세종 2년(1420) 윤정월 10일 대마도주는 다시 사자를 보내, "대마도는 조선을 주군으로 하며, 그 주명(州名)을 지정받고자 한다. 동시에 조선 조정에서 주군인(州郡印)을 사여(賜與)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동년 동월 23일 조선은 대외적으로는 외무장관 일을 맡는 예조판서 허조(許稠, 1369∼1439)를 통해 대마도를 다시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그 군관에 대한 관례대로 관인(官印)을 사여하였다. 일부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대마도와 관계를 단순한 조공관계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즉 동북아 세계에서 조공관계는 국제적인 외교절차일뿐 그것만으로 영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선은 대마도와 단순한 조공관계에 그친것이 아니라 경상도에 분명하계 예속시켰다. 이것은 역사에 분명하게 나와있는 것이며, 이후 수백여차례 제작된 조선지도에서 수없이 확인된다.
이와같은 자료에 근거하면 대마도는 이미 우리 땅인 것이다. 이제 대마도를 구경하거나 관광의 대상으로만 삼지 말고, 우리땅으로 선언하고, 우리땅으로 실효성있는 지배를 위하여 구체적인 노력을 해야 할 때이다. 나아가 우리나라 국사책과 지도책에 대마도의 역사와 아울러 우리땅임을 명기하고 가르치는 일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국제적으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하여 대마도가 우리 땅임을 천명하고, 이를 위한 학술적인 노력을 구체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위와같은 자료를 블로그를 통해서 제시한 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출처 : 에이블뉴스(https://www.abl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