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전쟁으로 얻은 고려의 평화의시대
귀주대첩에서 거란은 고려에 그냥 패전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거란군 10만의 기병이 전멸했다는 귀주대첩은
거란의 친위 부대인 우피실군을 비롯한 거란군 최정예 부대가
모두 증발해 버린 패전이었습니다.
우피실군은 거란 태종 야율덕광이 천하의 정예병을 모아
황제 직속의 친위군으로 키웠다는 거란의 최정예 주력군입니다.
과거 송나라를 침공하며 엄청난 국력을 과시하던 거란은
이 막강한 기병 전력으로 군사 우위를 점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이런 거란의 정예병력은 고려 땅에서 모두 증발했습니다.
우피실군, 천운군, 요령군, 발해군 등 정예군은 모두 전멸했고
이들 군을 이끌던 지휘관도 모두 전사했습니다
1/10 정도의 패잔병만 간신히 살아 돌아갔다 합니다
고려는 심지어 무슨 성에서 방어를 통해 막은게 아녔습니다
고려군은 거란군을 벌판의 야전에서 힘으로 물리쳤습니다.
고려군과 거란군이 귀주성 앞 벌판에 붙어서 싸웠고
거란군의 최정예 병력은 모두 전멸하며 궤멸이 됩니다
이후 거란은 완전히 거세 당하여 군사력을 상실하죠
고려를 두 번 다시 침공 못 함은 물론 이거니와
주요 목표인 송나라에 대한 전쟁 능력도 상실하였습니다.
고려가 승전한 귀주 대첩의 엄청난 여파로
동아시아는 120년 간 강제 평화 시대가 열렸습니다.
당연히 동아시아 전체에 고려의 위업이 알려졌습니다.
그 당시 고려의 위용이 어느 정도 였는가 하면
고려 사신은 송나라에 가서 거란 사신이 보는 앞에서
귀주대첩 전승 연회를 대대적으로 열었습니다.
그 연회 비용을 전부 내야만 하는 송나라나
자국의 패전을 조롱하는 걸 지켜보는 거란이나
그 누구도 감히 고려에 항의조차 못 하였습니다.
이후 인터넷에 유명한 동아시아 깡패 고려 사신 썰이 나옵니다
고려 선종 2년 선동의 생신 연회에 거란 사신이 하례 하고자 왔는데 지각을 했다 그러자 고려 신하들이 거란 사신의 이름이 가급(가히 도달할 수 있다) 어찌 불급(도달하지 못하다) 되었느냐? 대놓고 거란 사신을 조롱하였다
- 고려 사신이 조공을 위해 송나라에 이르면 주군의 관리들을 능멸하였고 고려사신을 모시는 관리들도 고려 사신의 세도를 믿고 날뛰어 예를 지키지 않았다
- 흠종이 즉위 하자 고려의 축하 사신이 왔다 이에 상소하여 아뢰기를 고려 사신들이 50년간 국가에 해악을 끼치고 해마다 조공 사신을 보내니 고려 사신을 접대 하는 회수 지역 절강 지역 백성들이 괴로워 하고 있습니다
- 고려가 거란에 매해 6번이나 조공을 하였지만 그 가렴주구를 이로 헤아릴 수 없었다 고려 사신이 거란에 이르면 더욱 포악해져 조금이라도 비위에 거슬리면 관리에서 공경에 이르기까지 머리채를 함부로 잡고 채찍으로 폭행하였다.
외교 예법상 송나라와 거란은 고려를 책봉 하는 황제국이고
고려는 이들에게 책봉을 받는 형식상 신하국입니다.
근데 현실에서는 그 정반대가 되어 버립니다.
거란에 도착해 가면 거란의 관리를 길에서 뚜드려 패고
송나라에 도착해 가면 송나라 관리에게 돈을 뜯어가며
정작 고려의 사신에게 거란과 송나라는 매번 모욕을 당했죠
이 기괴한 조공 관계는 한동안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조용히 찌그러져 있던 거란은
결국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을 막지 못 하고 멸망하였습니다
그럼 여진족은?
여진족은 고려 건국 초 부터 고려에 귀부하여 조공을 하였는데
완안부가 성장을 하면서 고려의 국경을 침탈 하기에 이릅니다
급기야 고려군이 여진족에게 패주 하게 되었으니
이런 여진의 급성장 위기를 느낀 고려에서는
이참에 여진을 정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윤관의 여진정벌과 동북 9성입니다
고려는 여진족 족장을 모두 모아서 초청한 자리에
갑자기 기습을 하여 족장들을 모두 죽인 것을 시작으로
여진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고려는 17만의 대군을 동원하였습니다.
말 그대로 해당 지역의 여진을 초토화 시키며 정복했고
9개의 성을 쌓아 고려군을 주둔 시켜 지키게 했으니
고려의 동북 9성이라 합니다
해당 성들의 정확한 위치는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
고려의 소드마스터 척준경이 활약한 것도 이때의 기록입니다.
하지만 고려의 여진 정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근거지를 상실한 여진의 완안부는
이를 되찾기 위해 지속적으로 고려와 전쟁을 하였고
여진족의 명장 사묘아리가 공험진 전투와 갈라수 전투에서
고려군 7만을 격파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고려는 여진과 화친 하게 되었고
여진은 고려의 신하 국이 되어 조공하는 조건으로
고려는 여진에게 동북 9성을 돌려줬습니다.
이후 여진은 완안부를 중심으로 여진을 재통합하였고
금나라를 건국해서 요나라를 멸망 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어서 중국 대륙으로 진출해 북송까지 멸망 시켰습니다
근데 신기하게도
고려의 여진 정벌 이후 금나라는 몽골에 멸망하는 마지막까지
진짜로 고려를 단 한번도 침략을 한 바가 없습니다.
이에 대한 금나라의 기록
=
"고려가 혹시라도 침략해 오면 너의 군대를 정돈하여 고려와 싸워라 하지만 함부로 먼저 고려를 침범한 자는 승전을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리겠다" -금사 고려조 천회 2년
금나라는 힘들었던 전쟁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여진족은 과거에 고려를 함부로 침공했다가
무려 고려 17만 대군의 여진 정벌이란 반격을 당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고려군을 이끄는 사령관 윤관에게 장수 척준경에게
말 그대로 여진족 부락들과 영토 전부가 쓸려 나가며
대대적으로 학살 되는 공포도 경험하였습니다
이후 동북 9성을 고려로 부터 되찾기 위해
여진족은 수년 동안 고려와 사투하며 전투를 지속했고
고려에 복속 하는 댓가로 어렵게 동북 9성을 찾았으나
고려와 싸워야 했던 처절한 전쟁은 여진족에게
이후 커다란 트라우마로 남았던 것이죠
당시 동아시아를 제패한 금나라는
요나라도 멸망 시키고 송나라도 멸망 시켰지만
두번 다시 고려와 전쟁을 시도할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고려는 북방과 전쟁을 모두 승리 하면서 이룩한
절대적인 평화의 시기를 맞이 했습니다.
당시 동아시아 국가에는 여러 환란이 있었죠
하지만 고려는 요나라가 망하던 송나라가 망하던
모두 고려와 무관한 일이 되었고 평화와 번영을 누렸습니다.
장장 120년 간 이어진 고려의 평화 기간 동안
고려는 찬란한 귀족 문화를 꽃 피웠고
벽란도 무역을 통해 아라비아와도 교류하며
고려 최대 전성기를 누리며 번영했습니다.
급기야 오랜 평화가 장기간 이어지자
고려에서 무신은 천대 받는 지위가 되어 버렸고
이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의 반란으로
고려 내부에서 무신 정권의 내전을 겪었을 뿐
외부에 의한 침략은 이후에도 고려에게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대로 치면 당시 수명 4세대를 넘고
왕이 15번이나 바뀌는 엄청난 시간을 지나
고려거란 3차 전쟁
1차 993
2차1010
3차1090
승리 120년후
1231년 고려에 다시 나타난 외세의 첫 침공이 발생했으니
바로 몽골의 침공입니다.
조선도 1392년 건국후 약200여년 동안 평화의 시대였다
그기간동안 계속 전쟁만한 실전경험이 품품한 쪽바리 의 침략 과 소빙기로 인한
가뭄이 겹쳐 삶림살이가 팍팍 해졌다
쪽바리 침략 때 군사지원 해준 나라
우리가 사극에서 보는
명나라 사신의 횡포가 생겼다